QT 나눔
제 목 [] 멀찍이
본문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혀서 대제사장 가야바와 서기관들과 장로들 앞으로 끌려옵니다.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왔던 베드로는 결말을 보려고 대제사장의 집뜰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대제사장과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인들을 세우지만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인지 묻는 질문에 긍정하는 예수님에게 대제사장은 신성모독이라며 사형을 선고합니다. 무리들은 침을 뱉고 때리며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저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말씀은 58절,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중에 ‘멀찍이’ 라는 단어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어제 말씀에서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고 했었는데, 아마도 베드로는 도망가다가 돌아온 모양입니다. 그런데 특히한 점은, 마태는 베드로가 돌아온 이유가 ‘결말을 보기 위해서’라고 적고 있습니다. 마태가 주목했던 베드로가 기대한 결말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 마지막까지 베드로는 구원자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기적 같은 반전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결국 무력하게 사형을 언도받고 무리들에게 모욕과 폭력과 조롱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베드로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을 것 같습니다. 마태가 ‘멀찍이’ 따라갔다고 표현한 그 거리에 담긴 베드로의 마음을 상상해 봅니다. 자신이 안전할 만큼의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는 분명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도망가 버린 다른 제자들보다는 좀 나아 보이지만, 아직도 자신이 생각한 대로의 메시야를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그렇게 여러 차례 설명해 주었는데도 끝까지 믿지 못하며 자신의 생각에 빠진 슬픈 베드로를 만납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베드로를 묵상하다가 나는 얼마큼의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아침에 큐티를 할때는 예수님이 제 앞에 계신것 같이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하루를 살면서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다가 보면 어느새 시선을 빼앗겨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 옆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말씀을 찾으려고 열었던 전화에 올라와 있는 숏츠 하나를 무심코 클릭했는데, 연달아 올라오는 짧은 영상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줄 모르다가 내가 왜 처음에 무엇을 찾으려고 하였는지가 생각나서 마음이 씁쓸해 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세상의 전략은 마음 빼앗기인 것 같습니다. 주 안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무작정 떠내려가는 종이배처럼 힘없고 가련한 인생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베드로 모습처럼요. 예수님을 ‘가깝게’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까지도 함께 받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니, 저에게도 그런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62절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고, 63절에 침묵하셨습니다. 거짓 증인들을 세워 예수를 죽일 증거를 찾는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서 무척 억울하셨을 예수님이 왜 침묵하셨을까 생각하는데 이사야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장 7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침묵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피하지 않으셨고, 잠잠히 모든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의 배신까지도 견디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을 걸 아시면서도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밝히시며, 불의한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 ‘가까이’로 사명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가까이’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어떤 거리를 두고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깨어진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멀찍이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은 세상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지만 언제나 거리를 두지 않고 ‘가까이’ 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내 안을 들여다보니 최근엔 반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2주 동안 주말에 연달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 주는 가족들과 L.A.로 손흥민과 메시가 붙는 축구 개막전을 보러 갔고, 이어 그다음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러 텍사스 오스틴에 다녀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보암직 한것을 보고 먹음직 한것을 먹고 지내다 보니,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마음속 생각들도, 세상에 가깝게 다가갈수록 하나님에게서는 멀어짐을 경험했습니다. 두 주말이어서 그렇지, 매 주말을 그렇게 보낸다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질 것이 분명한 나의 연약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와 교회와의 거리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처음 믿고는 날마다 교회로 달려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예배와 행사에 다 참여하고 싶어서 교회 ‘가까이’로 이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와 교회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의 리더십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서라는 이유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니 회개하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교회와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믿음 없는 자의 변명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니까요. 나와 하나님과의 거리, 나와 교회의 거리, 나와 말씀의 거리, 나와 기도의 거리를 항상 돌아보며, 마음을 돌이켜서,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 섬김의 자리에 더욱 ‘가까이’ 가기로 적용합니다.
베드로가 기대했던 결말을 상상해 보다가, 나는 나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결말을 보고 싶은지 자문해 봅니다. 나의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날마다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천국을 경험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을 미리 짐작하게 해 주셔서, 내가 머물던 곳을 내 손으로 정리하고 떠나고 싶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내 발로 걷고 내 손으로 음식을 해 먹으며, 내 손으로 연필을 잡고 마지막 큐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오늘도 큐티하고, 오늘도 달리기를 합니다. 베드로가 기대했던 역전의 결말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사소한 행복들을 마지막 날까지, 날마다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자연도, 맛있는 음식도, 하루를 깨우는 라떼 한 잔도, 말씀에서 주시는 은혜 못지않은 은혜라는 것을 깨달으며 살고 있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결말은 심판이겠지만, 심판도 은혜인 인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로 저에게 다가온 말씀은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라는 59절 말씀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세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삶에는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는 행동에는 하나님은 없고 자신의 이권을 잃지 않으려는 세상의 탐심만이 가득해 보입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들의 평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인정하심으로 십자가를 향해 죽음을 향해 작정하시고 나아가십니다. 불의한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 사명의 길을 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향하십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죽일 수 있는 증거를 자발적으로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그러실 수 있었던 것은 지금 겪는 고난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십자가 고난 이후 부활 승천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불의한 상황에서도 내가 감당할 사명의 길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감당한 결과가 모욕과 조롱이더라도 나는 예수님처럼 그 사명의 길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예수님처럼 침묵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눈뜨면 마주하는 불의함, 심지어 교회에서도 대면하게 되는 불의함들에 대하여 이 땅의 주도권을 지니신 분은 하나님 한분 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침묵함으로 순종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선으로 갚는 길의 시작은 '침묵'이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니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따지고 싶었던 한 자매님의 무례한 행동들이 생각납니다. 분했고, 부당했고, 억울했습니다. 똑같이 쏘아붙여 주고 싶었고 사과를 꼭 받고 싶었습니다. 카톡 폭탄을 일방적으로 퍼부으며 인신공격을 하였던 자매도 떠오릅니다. 카톡 메시지를 여는 데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 되어가며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시는 사명의 길은 죽는 길이었다는 것과 예수님은 그 길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가셨다는 것을 보여 주시니 나도 입을 닫고 침묵하기로 적용합니다. 내가 입을 닫고 가야 할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 믿어집니다. 똑같이 쏘아붙여 주지 않아도, 따지지 않아도, 구지 사과를 받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신기한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에도 사명의 길을 멈추지 않으신 예수님의 순종을 배웠습니다. 그 사명의 길이 두렵고 힘들어 보여서 베드로처럼 멀찍이 따라갔던 제 모습을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저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잊지 않고 행하는 믿음을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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