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 <못>
단단히 싸 말아서 공을 만들기도 하시고,
단단한 곳에 못을 단단히 박기도 하시는 하나님.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면(18절), <공>이 될 것이요,
<내 종>이라 인정을 받으면(20절), 단단한 곳에 박히는 <못>이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의 셉나는,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친 모델로 등장한다.
셉나도 처음부터 <공>신세 될 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높은 관직에 <못>박혀 있던 한 사람이었다.
그 셉나가 궁을 차지했다고 한다. 높은 곳에 묘실을 팠다고 한다.
왕 자리에 앉으려는 명예욕이 있었던 것 같다.
반면, 엘리아김은 어떠한가?
자기 손으로 옷을 입지 않고 띠를 띠지도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나보다.
그런 엘리아김에겐, 하나님이 직접 옷을 입혀주시고
띠 띠워 주셔서(21절), 정권(Authority)를 맡기시겠다고 한다.
처음, 이 본문을 접했을 땐,
교만한 자를 버리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다가왔다. 그러면서, 두려워졌다.
교만 한가지를 회개하면, 다른 한가지 교만에 속는
나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이런 말씀을 주시나...하고 말이다.
다행이다.
묵상 끝자락에서, <회복>의 하나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관직을 완전히 박탈한 것도 아니고, <네 관직에서 낮추고>(19절)
라는 말씀이, 내게 소망을 주었다.
훗날, 셉나가 쫓겨나서 죽임을 당한 걸 보면,
<낮아진 자리>에서, 회개하지도 겸비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셉나가 회개했다면, 이사야서의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셨을텐데...
그래서, 요즘 어쨌든 회개의 시간을 자꾸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
그런데, 묵상하면 할수록 말씀이 다시 무겁게 다가왔다.
셉나의 하나님보다, 엘리아김의 하나님이 더 두려운 하나님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못 스스로 삭아서 부러지기도 한다는 걸로 봐서(25절)
<단단한 곳에, 박아도 주시지만! 못 노릇을 제대로 못하면 빼시기도 하시는 하나님>
이심도 귀뜸해 주셨다.
<공>이야 혼자 떨어지면 그만인데,
<못>은 부러져 떨어질 때 못이 걸고 있던 물건까지 함께 떨어질 것이라 한다.
그렇구나...
<공>보다, <못>의 책임이 더 중하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단단히> 박아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못>의 본질이구나!
요즘, 남편과 나의 모습을 비교해 본다.
남편의 관직이 점점 낮아져서, 이제는 허드렛일까지 하고 있다.
나는? 나의 부족함들이 자꾸 드러나니, 내 마음이 자꾸 움츠러드는 요즘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기뻐하고 보람도 느끼고 마음의 여유도 있는 남편과는 달리,
나는, 추락하는 것 같은 내가 불만스럽고, 나를 막고 선 환경들을 불평한다.
남편은 이번에 제대로 회개했나보다.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저렇게 기쁨을 회복했나보다.
나도 더 회개해야겠다. 십자가에서 단번에 죄는 사해지지만,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뉘우침의 시간을 갖는 내 모습을 원하시는 것 같다.
아무래도 <삭은 못>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베려인 것 같다.
녹슬어 있던 내 영혼에 광을 내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않겠나...
이사야 22장 22절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분명히 <그>가 열면 닫을 자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 했는데!
열었다 닫았다 할 능이 마치 내게 있는 것처럼
어느새 착각하고, 변질되어 가고 있는 나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다.
내게 맡겨진 사람들의 마음도 내가 열려 하고 내가 닫으려 하고
내 멋대로 했던 죄도 회개하는 중이다.
열쇠를 <머리>에 두지 않으시고, <어깨>에 두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이번 한 주라도 깨어서 살아야겠다.
단단한 곳에 못을 단단히 박기도 하시는 하나님.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면(18절), <공>이 될 것이요,
<내 종>이라 인정을 받으면(20절), 단단한 곳에 박히는 <못>이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의 셉나는,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친 모델로 등장한다.
셉나도 처음부터 <공>신세 될 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높은 관직에 <못>박혀 있던 한 사람이었다.
그 셉나가 궁을 차지했다고 한다. 높은 곳에 묘실을 팠다고 한다.
왕 자리에 앉으려는 명예욕이 있었던 것 같다.
반면, 엘리아김은 어떠한가?
자기 손으로 옷을 입지 않고 띠를 띠지도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나보다.
그런 엘리아김에겐, 하나님이 직접 옷을 입혀주시고
띠 띠워 주셔서(21절), 정권(Authority)를 맡기시겠다고 한다.
처음, 이 본문을 접했을 땐,
교만한 자를 버리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다가왔다. 그러면서, 두려워졌다.
교만 한가지를 회개하면, 다른 한가지 교만에 속는
나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이런 말씀을 주시나...하고 말이다.
다행이다.
묵상 끝자락에서, <회복>의 하나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관직을 완전히 박탈한 것도 아니고, <네 관직에서 낮추고>(19절)
라는 말씀이, 내게 소망을 주었다.
훗날, 셉나가 쫓겨나서 죽임을 당한 걸 보면,
<낮아진 자리>에서, 회개하지도 겸비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셉나가 회개했다면, 이사야서의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셨을텐데...
그래서, 요즘 어쨌든 회개의 시간을 자꾸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
그런데, 묵상하면 할수록 말씀이 다시 무겁게 다가왔다.
셉나의 하나님보다, 엘리아김의 하나님이 더 두려운 하나님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못 스스로 삭아서 부러지기도 한다는 걸로 봐서(25절)
<단단한 곳에, 박아도 주시지만! 못 노릇을 제대로 못하면 빼시기도 하시는 하나님>
이심도 귀뜸해 주셨다.
<공>이야 혼자 떨어지면 그만인데,
<못>은 부러져 떨어질 때 못이 걸고 있던 물건까지 함께 떨어질 것이라 한다.
그렇구나...
<공>보다, <못>의 책임이 더 중하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단단히> 박아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못>의 본질이구나!
요즘, 남편과 나의 모습을 비교해 본다.
남편의 관직이 점점 낮아져서, 이제는 허드렛일까지 하고 있다.
나는? 나의 부족함들이 자꾸 드러나니, 내 마음이 자꾸 움츠러드는 요즘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기뻐하고 보람도 느끼고 마음의 여유도 있는 남편과는 달리,
나는, 추락하는 것 같은 내가 불만스럽고, 나를 막고 선 환경들을 불평한다.
남편은 이번에 제대로 회개했나보다.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저렇게 기쁨을 회복했나보다.
나도 더 회개해야겠다. 십자가에서 단번에 죄는 사해지지만,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뉘우침의 시간을 갖는 내 모습을 원하시는 것 같다.
아무래도 <삭은 못>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베려인 것 같다.
녹슬어 있던 내 영혼에 광을 내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않겠나...
이사야 22장 22절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분명히 <그>가 열면 닫을 자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 했는데!
열었다 닫았다 할 능이 마치 내게 있는 것처럼
어느새 착각하고, 변질되어 가고 있는 나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다.
내게 맡겨진 사람들의 마음도 내가 열려 하고 내가 닫으려 하고
내 멋대로 했던 죄도 회개하는 중이다.
열쇠를 <머리>에 두지 않으시고, <어깨>에 두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이번 한 주라도 깨어서 살아야겠다.
그분께 깊이 믿음의 뿌리 내린 소범 자매님께 하나님의 강한 손이 함께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