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그때 그사람 맞수?
이사야 <39:1~8>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글과 예물을 보낸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
그가 예물과 함께 보낸 글에는 무어라고 적혀 있었을까?
죽을 수 밖에 없는 히스기야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바벨론 왕은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했나보다.
대체 어떤 신이 히스기야를 살려 주셨나 그게 궁금했을까?
자기네들도 그 신을 의지하여 더 부강해지고 싶었을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살려 주신 이적에 대해 꽤나 궁금했나 보다.
또한 그 편지는 히스기야의 심중을 알고자 하신 하나님의 테스트였단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통해 하나님을 높여 드림을 얼마나 기대하시고
바라셨을까?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 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역하 32:24>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역하 32:31>
나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만 히스기야를 만나게 된다.
온통 <나> 외에는 자식에게도,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는듯 하다.
병 고침을 받고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모든 언어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이 온통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착각을 하고 있다.
아~ 화요일 수요일 본문에서 하나님께 눈물 콧물로 은혜로운 기도를 드린
그때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 변심해 버린 히스기야.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39:3>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 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39:8>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39:8>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덤으로 살려 주신 생명인데도 하나님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의 평안함으로 만족하며 자식 교육도 소홀히 하고 말았다.
큐티를 시작한지 첫 3,4년동안 나의 삶이 회복되면서
기회가 있을때마다 간증을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들을 간증할때
<나> 자신이 주어가 되어 <나의 의> 가 더 드러날때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온전히 하나님께서 해 주셨어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고 나도 많이 노력했어요.” 가 슬쩍 슬쩍 삽입되었었다.
히스기야는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않았다는데
나는 그래도 양심은 좀 있어서 하나님을 간증하면서도 한쪽눈은
깨꾸 눈(?)을 하고 내 냄새를 은근히 풍겼으니…
오늘 아침 ㅇㅇ 자매와 만나 긴 시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서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며 말씀 안에서의 좋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예전에 비해 나의 언어가 많이 변해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속에는 많은 허물과 약점 투성이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껍데기인
육신에 불과하며 지난 수년간 이 허울뿐인 육신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덧입어 그나마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고백을 하게 하셨다.
온통 <내가> 라는 관점에서 이젠 <하나님께서> 의 관점으로 바꾸게 하신다.
자신이 난 자식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간다는 이사야의 무서운 예언의 말이
히스기야에게 얼마나 실감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동안
평안하고 견고하면 그만이라는 근시안적인 사고 방식의 히스기야를 보며
또 한번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사야의 말에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라는 말 대신에
“싫소이다. 후손에게도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지요” 라며 한번 더 심사숙고 했더라면…
나도 히스기야처럼 “나나 잘먹고 잘살면 되지”라는 안일하고도
이기적일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말씀 앞에 앉히셔서
나를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꾸 바라 보게 하신다.
히스기야가 병고침을 받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대목에서
끝나지 않고 이렇게 망가진 모습에서 중단되니 더욱 은혜가 된다.
이제 나의 자녀들이 므낫세같이 되지 않도록
올 여름에는 정말 자녀들의 큐티 정착에 힘을 쓰련다.
<오늘의 적용, 실천>
나의 대화를 통해 순간마다 나의 심중을 시험해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자.
현희와 철이가 제 2의 므낫세가 되지 않도록 여름에 큐티 노트를 매일 쓰게 하자.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글과 예물을 보낸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
그가 예물과 함께 보낸 글에는 무어라고 적혀 있었을까?
죽을 수 밖에 없는 히스기야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바벨론 왕은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했나보다.
대체 어떤 신이 히스기야를 살려 주셨나 그게 궁금했을까?
자기네들도 그 신을 의지하여 더 부강해지고 싶었을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살려 주신 이적에 대해 꽤나 궁금했나 보다.
또한 그 편지는 히스기야의 심중을 알고자 하신 하나님의 테스트였단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통해 하나님을 높여 드림을 얼마나 기대하시고
바라셨을까?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 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역하 32:24>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역하 32:31>
나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만 히스기야를 만나게 된다.
온통 <나> 외에는 자식에게도,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는듯 하다.
병 고침을 받고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모든 언어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이 온통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착각을 하고 있다.
아~ 화요일 수요일 본문에서 하나님께 눈물 콧물로 은혜로운 기도를 드린
그때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 변심해 버린 히스기야.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39:3>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 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39:8>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39:8>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덤으로 살려 주신 생명인데도 하나님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의 평안함으로 만족하며 자식 교육도 소홀히 하고 말았다.
큐티를 시작한지 첫 3,4년동안 나의 삶이 회복되면서
기회가 있을때마다 간증을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들을 간증할때
<나> 자신이 주어가 되어 <나의 의> 가 더 드러날때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온전히 하나님께서 해 주셨어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고 나도 많이 노력했어요.” 가 슬쩍 슬쩍 삽입되었었다.
히스기야는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않았다는데
나는 그래도 양심은 좀 있어서 하나님을 간증하면서도 한쪽눈은
깨꾸 눈(?)을 하고 내 냄새를 은근히 풍겼으니…
오늘 아침 ㅇㅇ 자매와 만나 긴 시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서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며 말씀 안에서의 좋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예전에 비해 나의 언어가 많이 변해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속에는 많은 허물과 약점 투성이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껍데기인
육신에 불과하며 지난 수년간 이 허울뿐인 육신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덧입어 그나마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고백을 하게 하셨다.
온통 <내가> 라는 관점에서 이젠 <하나님께서> 의 관점으로 바꾸게 하신다.
자신이 난 자식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간다는 이사야의 무서운 예언의 말이
히스기야에게 얼마나 실감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동안
평안하고 견고하면 그만이라는 근시안적인 사고 방식의 히스기야를 보며
또 한번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사야의 말에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라는 말 대신에
“싫소이다. 후손에게도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지요” 라며 한번 더 심사숙고 했더라면…
나도 히스기야처럼 “나나 잘먹고 잘살면 되지”라는 안일하고도
이기적일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말씀 앞에 앉히셔서
나를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꾸 바라 보게 하신다.
히스기야가 병고침을 받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대목에서
끝나지 않고 이렇게 망가진 모습에서 중단되니 더욱 은혜가 된다.
이제 나의 자녀들이 므낫세같이 되지 않도록
올 여름에는 정말 자녀들의 큐티 정착에 힘을 쓰련다.
<오늘의 적용, 실천>
나의 대화를 통해 순간마다 나의 심중을 시험해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자.
현희와 철이가 제 2의 므낫세가 되지 않도록 여름에 큐티 노트를 매일 쓰게 하자.
제목만 봐도 히스기야왕의 신앙이 눈에 보입니다.
역대하의 상관구절들을 기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큐티가 더욱 풍성해지고 정리가 되네요.
감사!